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기독교 박해 (문단 편집) === 종결 === 311년 4월 30일, 임종을 눈앞에 두고 있던 갈레리우스는 박해를 중단하고 기독교인들이 자유롭게 집회를 가질 수 있게 해주는 '관용 칙령'을 발표했다. 칙령의 서문에서는 제국의 통치자들이 기독교인들을 박해할 때 어떤 원칙에 따라 인도받았는지, 즉 국가의 이익과 선에 대한 열망, 조상의 법에 따라 살고 싶은 열망, 그리고 광기로 여러 민족을 오염시킨 기독교인들을 그들의 조상들의 길로 되돌리고 싶은 열망 등에 대한 설명이 기재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원하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다며, 순종한 사람들은 형벌이 두려워 그렇게 했고 많은 사람이 '고집'을 꺾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갈레리우스는 이에 따라 자비를 베풀어 기독교인들이 질서를 어기지 않는 선에서 자유롭게 생활하고 집회를 조직할 수 있게 하도록 허용했다. 락탄티우스와 에우세비우스는 갈레리우스가 죽음의 공포로 인해 입장을 바꿨다고 주장했고,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많은 역사가들도 이에 동의했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그 보다는 [[사두정의 내전]]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달래려는 정치적 동기가 주된 이유였을 거라고 해석한다. 갈레리우스는 기독교인들의 몰수된 재산을 돌려주는 건 동의했지만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이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한 달 후 갈레리우스는 온 몸이 썩어가는 증세를 보이다 사망했고, 동방의 단독 황제가 된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갈레리우스 칙령을 무효화하고 기독교 박해를 이어갔다. 312년 [[막센티우스]]를 상대로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승리해 서방의 최고 권력자가 된 [[콘스탄티누스 1세]]는 313년 2월 발칸 반도의 지배자인 [[리키니우스]]와 논의 끝에 기독교를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한다는 내용의 [[밀라노 칙령]]을 합의했다. 리키니우스는 막센티우스를 꺾고 동방의 단독 황제로 우뚝 선 뒤 313년 6월 13일 니코메디아에서 모든 동방 총독에게 이 칙령을 하달했다. 이리하여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시작한 기독교 박해는 종결되었다. 훗날 리키니우스가 콘스탄티누스 1세와 갈등을 벌이면서 기독교 박해를 일시적으로 재개했지만, 324년 콘스탄티누스가 리키니우스를 꺾고 로마 제국의 단독 황제가 된 후 기독교는 제국의 지배적인 종교로 자리잡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